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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Culture Club

Culture club

Boy George(본명 : George O'Dowd)
보이 조지는 짙은 메이크업과 화려한 여장 차림으로 팝 음악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몰고 왔던 영국 가수이다. 그는 MTV의 여명기였던 1980년대 초반 그룹 컬처 클럽(Culture Club)을 이끌며 자신이 지닌 남녀 양성의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뚜렷이 각인시켰다. 컬처 클럽의 해산 후에는 솔로로 독자적인 활동을 펼쳤지만 그룹 때의 영광을 두 번 다시 재현하지는 못했다. 그는 자극적인 이미지로 점철된 1980년대의 상업적인 팝 음악을 대표하는 아이콘인 동시에 변덕스러운 대중들의 기호에 휘둘려 천당과 지옥을 오간 불행한 팝스타이다.

1961년 한 복싱 클럽 매니저의 아들로 태어난 보이 조지는 십대 시절 티 렉스(T-Rex), 데이빗 보위(David Bowie)로 대표되는 글램 록을 즐겨들으며 가수의 희망봉을 꿈꿨다. 그는 당시 펑크가 쓸고 간 후 런던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뉴 로맨틱스 클럽에 단골로 드나들었고, 독특한 바이 섹슈얼의 옷차림과 장신구로 단숨에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펑크의 대부로 잘 알려진 '사기꾼' 말콤 맥라렌(Malcolm McLaren)이 바우 와우 와우(Bow Wow Wow)의 초창기 멤버로 보이 조지를 초대했을 정도였다.인 프레이즈 오브 레밍스(In Praise Of Lemmings), 섹스 갱칠드런(Sex Gang Children) 등으로 수 차례 그룹 이름을 바꿔가며 밴드를 이끌어가던 보이 조지는 1981년 그룹명을 컬처 클럽으로 최종 확정하고 본격적인 인기몰이에 나섰다. 컬처 클럽의 기세는 무서웠다.

영국과 미국 차트에서 맹위를 떨치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깔끔한 뉴 웨이브 팝 사운드를 타고 흐르는 보이 조지의 소울풀한 목소리는 당시 음악계의 대세였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훌륭했다. 또한 뮤직 비디오에 비춰지는 그의 양성적인 매력은 대중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며 컬처 클럽을 타 밴드와 확실히 선을 긋게 만들었다. 그리고 위트 넘치는 그의 화법도 그룹의 고공행진에 일조했다. 이에 힘입어 컬쳐 클럽은 1984년도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신인상'을 거머쥐었고, 보이 조지는 음악과 패션의 뉴 리더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화려한 시절은 잠깐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패션계의 트렌드와 마찬가지로 대중들은 컬처 클럽의 음악과 보이 조지의 이미지에 금방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여기에 보이 조지의 마약 중독 사실은 내리막을 걷고 있던 그룹의 인기에 치명타를 가했다. 보이 조지는 1986년 여름 자신이 헤로인에 중독되었음을 시인했고, 그 해 7월 그는 마리화나 소지죄로 영국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급기야 며칠 후에는 밴드의 세션 건반주자였던 마이클 루데츠키(Michael Rudetski)가 보이 조지의 집에서 헤로인 과용으로 숨진 채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보이 조지는 언론의 맹렬한 질타에 시달렸고 밴드는 해산이라는 수순을 밟았다. 

보이 조지는 그러나 야인(野人)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1년 뒤인 1987년 솔로 데뷔작 〈Sold〉를 발표하며 재기의 몸부림을 쳤다. 그는 브레드(Bread)의 'Everything I own'을 커버해 영국 차트 1위에 올려놓으며 아직 죽지 않았음을 만천하에 고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반응은 찬바람이 일 정도로 차가웠다. 1988년 2집 〈Tense Nervous Headache〉과 1989년 3집〈Boyfriend〉은 대서양을 건너지도 못하고 유럽에서만 발매됐다. 소속사인 <버진(Virgin)>에서는 두 앨범을 묶어 〈High Hat〉(1989)이란 제목으로 미국 시장을 노크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1991년의 미발표 싱글 모음집 〈The Martyr Mantras〉를 영국에서는 지저스 러브즈 유(Jesus Loves You)란 새로운 그룹명으로, 미국에서는 보이 조지의 이름 그대로 내놓았지만 역시 대중들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보이 조지는 추억의 뒤안길로 쓸쓸히 걸어 들어가는 듯 했다. 그러나 그는 2년 뒤인 1993년 닐 조단(Neil Jordan) 감독의 영화 〈Crying Game〉과 함께 극적으로 소생했다. 사운드트랙에 실은 데이브 베리(Dave Berry)의 1965년 히트곡을 커버한 'The crying game'가 미국 차트 15위에 랭크되며 현실 무대로 불러낸 것이다. 

이에 고무된 보이 조지는 야심작 〈Cheapness & Beauty〉(1995)를 내놓으며 재기를 노렸다. 자서전 〈Take It Like A Man〉까지 발간하며 대중들의 관심 회복을 기대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거기까지였다. 잠시 반짝했던 보이 조지는 다시금 망각의 늪 저편으로 멀어져갔다. 그는 가끔 잡지의 가십난에만 이름을 올렸을 뿐 대중들 앞에 당당히 나서지 못했다. 이후 보이 조지는 자신의 음악적 시발점인 런던의 댄스 클럽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이름에 디제이(DJ) 직함을 덧붙이며 클럽 댄스 음악에 깊이 몰입했다. 2000년에 내놓은〈Essential Mix〉가 그 결과물이었다.

지금도 보이 조지는 댄스 음악들을 믹스하며 디제이로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1980년대에 화려했던 인기도, 1990년대 잠깐 찾아왔던 재기의 순간도 모두 추억으로 묻어둔 채 여전히 독특한 차림으로 클럽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보이 조지는 감각적인 유행 음악의 짧은 수명을 실증하고 이미지에 좌우되는 매체 스타의 명암을 극명하게 보여준 안타까운 인물로 팝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글출처 : http://www.izm.co.kr/]

Colour by numbers 1983

From Luxury to Heartache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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